Chanyuan Treaty
Recently, like many of you, we’ve started watching the drama ‘Korea-Khitan War.’ It’s incredibly interesting! Equally fascinating is the history of conflicts between the Northern Song Dynasty and the Liao Dynasty during the same era. As we all know, in ancient times, the natural environment had a significant influence on a nation’s economy. The Liao, situated in a cold northern region, routinely raided the Song’s border areas every autumn, during the harvest season, to pillage food and other essentials. This ongoing plundering brought considerable suffering to the people of the Song and fueled continuous strife between the two countries.
In the year 1004, Liao Emperor Yelü Yongxi mobilized a force of 300,000 troops to invade the Song. Initially reluctant to engage in warfare, Song Emperor Zhao Heng was eventually persuaded by his ministers to take command of his forces at the frontline in Chanzhou. The presence of the emperor on the battlefield greatly boosted the morale of the Song army, leading to a significant victory where they killed a prominent Liao general early in the conflict. This turn of events prompted the Liao to propose peace talks. The negotiations led to the formation of the Chanyuan Treaty, a treaty that not only established trade relations but also recognized the two nations as equal ‘brother countries.’ Under this treaty, the Song agreed to pay the Liao 100,000 taels of silver and 200,000 bolts of silk annually. This commitment was manageable for the Song because the amount represented only about 1% of their government’s annual revenue, underscoring their economic strength and prosperity at the time. One might wonder, given the Song’s considerable wealth, why they didn’t invest more in strengthening their military. This decision was influenced by the prevailing national ideology of the period, which prioritized economic development over military expansion.
The treaty initiated a period of 120 years of peace. Remarkably, the Song even offered aid during famines to the Liao, similar to today’s international disaster relief efforts. Despite some perceptions of the treaty being dishonorable, it ultimately fostered lasting peace and significantly improved cultural and economic exchanges between the two countries. This also had a profound impact on the cultural and economic advancement of the Song. Looking back, the benefits of this treaty seem to outweigh its drawbacks. Nonetheless, the Song’s approach of preserving peace through financial means instead of military strengthening ultimately led to their vulnerability. This was exposed when the Jin invaded, forcing the Song to retreat to the south and marking the start of the Southern Song Dynasty.
최근 우리도 ‘고려거란전쟁‘을 보고 있어요. 참 재미있네요. 동시대의 송나라(북송)와 요나라(거란) 사이의 전쟁 역사도 매우 다채롭고 흥미진진했습니다. 자연 환경이 국가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컸던 시대이었죠. 추운 지역에 위치한 요나라는 매년 가을, 수확기가 되면 송나라의 국경 지역을 침공하여 식량과 생필품을 약탈했습니다. 이로 인해 송나라의 백성들은 큰 어려움을 느꼈고, 이러한 상황이 두 나라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004년에 요 성종 야율융서가 30만 군사를 이끌고 송나라를 침공했습니다. 송 진종 조항은 처음에는 전쟁을 원치 않았지만, 대신들의 강요에 의해 결국 전주(澶州) 전선에 직접 나섰습니다. 황제가 직접 지휘하자 송나라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라가 전쟁 초기 전투에서 바로 요나라 대장을 사살했습니다. 이로 인해 요나라는 송나라와 평화 협정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두 나라는 형제국가로서 관계를 맺고, 변경 지역에 무역 시장을 설립하고, 송나라가 매년 10만 냥의 은과 20만 필의 비단을 요나라에게 지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이 금액은 사실 당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송나라 정부 재정 수입의 1%에 불과했습니다. 송나라가 상당한 부를 가졌음에도 왜 군사력 강화에 더 많은 투자를 하지 않았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이 결정은 당시의 지배적인 국가 이념에 의해 영향을 받았는데, 그 이념은 바로 군사 확장보다 경제 발전을 우선했습니다.
전연의 맹(澶渊之盟)이라 불리는 이 협정은 120년간 평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심지어 요나라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 송나라가 식량을 지원했고, 이것은 현대의 국제주의적 원조와 비슷한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돈을 잃은 것처럼 보여 부끄러운 일로 여겨지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이 협정은 백성들에게 장기간의 평화를 가져다 주었고, 두 나라 사이에 다 방면의 교류가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송나라의 문화와 경제가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협정이 가져온 긍정적인 면이 부정적인 면보다 더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120년 동안 송나라는 군사력을 강화하지 않고 금전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방식을 계속 택했습니다. 결국, 120년 후 금나라의 침공으로 송나라는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남송의 시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