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Ultra: The Shocking Cold War Experiments Hidden by the CIA
Transcript
I was given a glass of Cool-Aid, and so were the other children.
저는 쿨에이드 한 잔을 받았고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This Cool-Aid was spiked with LSD. It was horrible.
그 쿨에이드에는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가 섞여 있었어요. 정말 끔찍했어요.
In the early days of the Cold War, the CIA ordered the creation of a secret program intended to find ways of mind control.
냉전 초기에 CIA는 마인드 컨트롤 방법을 찾기 위한 비밀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They funded an army of psychiatric institutions across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to perform experiments on unsuspecting patients using psychedelic drugs, sensory deprivation, electroshock treatments and more.
그들은 미국과 캐나다 전역의 정신과 기관에 자금을 지원하여 환각제, 감각 박탈, 전기 충격 치료 등을 사용하여 의심하지 않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The program was known by its code name: MK-Ultra.
이 프로그램은 코드명 MK-Ultra로 알려졌습니다.
At the end of the Korean War, a number of freed American POWs came home seemingly brainwashed and espousing communist propaganda.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석방된 수많은 미국 포로들이 공산주의 선전에 세뇌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American officials suspected that the soldiers had been subjected to what they thought were new communist mind control techniques.
미국 관리들은 포로들이 새로운 공산당의 심리 조종 기술에 노출된 것으로 의심했습니다.
Alarmed by the situation, the newly formed CIA allocated $25 million for psychiatric experiments on human beings.
새로 창설된 CIA는 이 상황에 놀라 인간을 대상으로 한 정신 실험에 2,500만 달러를 배정했습니다.
It was the most secret program ever conducted by the CIA in the United States.
이 실험은 미국에서 CIA가 수행한 가장 비밀스러운 프로그램이었죠.
Patients, psychiatric hospitals, prisoners and federal institutions, and even people in the public were given drugs without their awareness or consent and experimented on.
환자, 정신 병원, 수감자, 연방 기관, 심지어 일반인까지 당사자의 인식이나 동의 없이 약물을 투여하고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They established what were called safe houses, where prostitutes would lure men to these apartments.
그들은 안전가옥이라고 불리는 곳을 만들어 매춘부들이 이 아파트로 남성을 유인했습니다.
And then once the men were in the apartments, they were dosed with LSD.
그리고 일단 남자들이 아파트에 들어가면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를 투여했습니다.
And then they were basically studied by CIA scientists, usually behind a two-way mirror.
그런 다음 주로 양방향 거울 뒤에 숨은 CIA 과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습니다.
Another common practice was the hosting and observing of LSD-induced parties with live music.
또 다른 일반적인 관행은 라이브 음악과 함께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로 유도된 파티를 주최하고 관찰하는 것이었습니다.
These parties were called ‘Acid Tests’, and the culture that grew out of them play a key role in the development of the hippie and psychedelic movements a few years later.
이러한 파티는 ‘산성 테스트’라고 불렸으며, 이 파티에서 성장한 문화는 몇 년 후 히피와 사이키델릭 운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However, some of the most damaging experiments occurred at the Allan Memorial Institute in Montreal, Canada.
그러나 가장 피해가 컸던 실험은 캐나다 몬트리올의 앨런 메모리얼 인스티튜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There, under the direction of infamous Scottish American psychiatrist Dr. Ewen Cameron, unsuspecting patients, many of whom had common ailments such as postpartum depression, were experimented on with aggressive drug cocktails and extreme techniques.
악명 높은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정신과 의사 이완 카메론 박사의 지시에 따라 산후 우울증과 같은 흔한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공격적인 약물 칵테일과 극단적인 기법으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My father was a victim of Dr. Cameron. He was a 27 year old healthy skier, canoer, very athletic, and he had asthma.
제 아버지도 카메론 박사의 피해자였습니다. 27세의 건강한 스키 선수이자 카누 선수로서 운동신경이 아주 뛰어났지만 천식을 앓고 계셨죠.
They told him if he went to the Allan Memorial, they could cure his asthma.
그들은 아버지에게 앨런 메모리얼에 가면 천식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어요.
I was having trouble with my parents. My father and my stepmother decided to put me in the Allen Memorial Institute.
저는 부모님과 문제가 있었어요.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저를 앨런 메모리얼 인스티튜트에 보내기로 결정하셨어요.
They had no idea what went on in there. I was 16 when I was there.
그분들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몰랐어요. 그곳에 갔을 때 저는 16살이었어요.
Dr. Cameron pursued a concept he called ‘depatterning’, which was meant to reduce patients to an infantile psychological state wherein doctors could take advantage of the person’s cognitive vulnerability to attempt to rebuild their mind under the doctor’s control.
카메론 박사는 ‘탈패턴화’라는 개념을 추구했는데, 이는 환자를 유아기 심리 상태로 만들어 의사가 환자의 인지적 취약성을 이용해 의사의 통제하에 정신을 재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A popular method of choice to achieve this was called ‘psych driving’.
이를 위해 널리 사용되는 방법은 ‘정신 유도’라고 불렸습니다.
He also was put in an insulin coma for 36 days with a with a recording beside him saying that your mother hates you over and over and over and over and over.
또한 의사들은 아버지를 36일 동안 인슐린 혼수 상태로 만들고 옆에 ‘네 엄마는 널 계속 미워한다’는 녹음기를 틀어놓았습니다.
That was beside my bed constantly. Repeatedly. 250,000 and 500,000 times.
제 침대 옆에 계속 녹음기를 틀어놓았죠. 25만 번, 50만 번 반복했어요.
When patients were released from the Allan Memorial, they and their family’s lives would never be the same again.
앨런 메모리얼에서 퇴원했을 때 환자와 그 가족의 삶은 다시는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Well, there’s a lot I could not remember after I got out of the Allan. When my family came, I was a zombie. I didn’t even know who they were.
앨런 메모리얼에서 나온 후 기억나지 않는 것이 많았어요. 가족들이 왔을 때 저는 좀비였어요. 저는 그들이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했어요.
He never came out the same. He had a blank, blank look in his eye. He didn’t know who we were. He didn’t know we were his daughters.
그는 이전과 달랐습니다. 눈빛이 멍하고 공허했죠. 그는 우리가 누군지 몰랐어요. 자기 딸들도 알아보지 못했어요.
He lost his job. We went into poverty after he came out.
그는 직장을 잃었습니다. 아버지가 나오신 후 우리는 가난에 빠졌습니다.
In 1973, the MK-Ultra program was terminated, and some of the evidence of its activities was systematically erased.
1973년 MK-Ultra 프로그램은 종료되었고, 그 활동의 일부 증거는 체계적으로 지워졌습니다.
Most MK-Ultra survivors suffered in silence, taking their trauma with them to the grave.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침묵 속에서 고통받았으며 트라우마를 무덤까지 가지고 갔습니다.
Today, having received no formal apology or compensation.
현재까지도 공식적인 사과나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The children of some survivors are pursuing a class action lawsuit against the institutions they deem responsible.
일부 생존자의 자녀들은 책임이 있다고 판단되는 기관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